250124 김환기의 아내로서가 아닌 '여성 김향안'의 삶에 대한 단상
여느 때처럼 클로드커피에 앉아서 노트북을 두들기다가 잠시 숨을 돌리고 있었다. 검은 시트지로 감싸진 냉장고 벽에 붙은 몇 장의 엽서가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이미지였다. 지난 12월, 우연히 환기 미술관에 다녀온 지 미처 한 달이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1957년에 찍힌 오래된 사진이라기에는 너무 경쾌하고, 피사체가 중년의 부부라는 걸 감안했을 때 이렇게 귀여울 수 있을까- 싶은 유명한 사진을 한 달만에 다시 마주하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 때 환기 미술관에 갔을 때, 김환기의 아내 김향안이 남편의 사후에 그의 작품들을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텍스트를 읽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녀의 삶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문득 궁금해져 검색해보다가 우연히 마음을 울리는 기사를 하나 발견했다. (세상에는 참 좋은 컨텐츠가 많고, 그런 세상에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하다.)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2/07/16/UVXWJVGCAFDZ5HAWIISTR5BIJA/
20세기 두 천재가 사랑한 여인… 그는 동지이자 매니저, 후원가였다
20세기 두 천재가 사랑한 여인 그는 동지이자 매니저, 후원가였다 아무튼, 주말-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 시인 이상과 화가 김환기의 아내 시대 앞서간 예술 후원가 김향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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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이전에 클로드커피에 와서 책을 읽을 때, 김향안씨가 화가 김환기의 아내였을 뿐 아니라, 시인 이상의 아내이기도 했다는 걸 알게 되었었다. 상당히 흥미롭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걸 잊고 있었다. 한 사람의 삶이 어떻게 문학과 미술의 영역에서 20세기를 풍미한 한국의 대표 예술가 두 명의 이렇게나 깊게 엮일 수 있을까. 사람의 인생과 사람 간의 인연이란 역시나 참 흥미로운 것이다.
첫 번째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상과 변동림 간의 관계였다. 개화기의 젊은 지식인들은 어떤 사랑을 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 현대의 사랑과 비추어보면, 그들의 사랑은 좀 더 순수하고 뜨겁고 진지한 형태였던 것 같다.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보면 너무 진지해서 오글거린다고 말할 것 같기도 할 정도로. 몇 가지 인상적인 문장들을 옮겨 본다.
나는 이 태엽을 감아도 소리 안 나는 여인을 가만히 가져다가 내 마음에다 놓아두는 중입니다… 여인, 내 그대 몸에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으리다. 죽읍시다. “더블 플라토닉 슈사이드(double platonic suicide·정신적 동반자살)인가요?” 아니지요. 두 개의 싱글 슈사이드지요… 여인은 내 그윽한 공책에다 악보처럼 생긴 글자로 증서를 하나 쓰고 지장을 하나 찍어 주었습니다. “틀림없이 같이 죽어 드리기로.”
변동림의 회고 글에는 “우리 같이 죽을래?”라는 말을 고백처럼 들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상의 수필 내용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방풍림 우거진 속으로 철로가 놓여 있는 길”을 걸으며, “사람은 하나도 만날 수 없는 황량한 인외경(人外境)”에서 이들은 밀회를 나누었다.
“사랑이란 믿음이다. 믿지 않으면 사람은 서로 사랑할 수 없다. 믿는다는 것은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는 거다. 곧 지성(知性)이다”
두 번째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김향안의 진취성이다. 당시의 여성상을 생각했을 때, 그녀는 아웃라이어 중에서도 눈에 띄는 아웃라이어였을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세계 무대로 나아가고자 하는 소망을 품은 남편을 위해, 그보다도 먼저 새로운 땅에 발을 디딘 것이 바로 김향안이었다. 그녀는 소르본 대학과 에콜 드 루브르에 입학하여, 불어와 미술사를 먼저 공부하면서 파리 화단의 주요 인사와 교제하기 시작했다. 먼저 파리에 자리를 잡은 후, 김환기의 아틀리에를 구하고 개인전 일정까지 잡은 후 남편을 파리로 오게 했다는 걸 보며 감탄했다. 그야말로 전략가이자 동시에 실행가라고 할 수 있다.
세계적 화가인 모딜리아니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모델이자 화랑 주인 루냐 체코프스카과 친분을 쌓음으로써 김환기의 아틀리에를 구하고 개인전을 열 수 있었다는 걸 보면, 그녀는 저돌적 실행력을 갖추고 있었을 뿐 아니라 꽤나 대단한 인간적 매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하긴, 20세기를 풍미한 두 명의 예술가의 사랑을 받았을 정도라면 이미 말 다 하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갓 새로운 땅에 발 딛고 모국어가 아닌 새로운 언어를 배워 관계를 맺었을 것이라는 점, 한국이라는 나라의 위상이 갓 비참한 내전을 마친 최빈국의 위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녀가 파리 예술계의 중심부에 있는 인사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이를 지렛대 삼았다는 것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인생은 역시, 이렇게 주도적으로 당차게 살아야 한다. 1960년대 파리의 골목을 누비고 다녔을 김향안이 2025년의 나에게 전달하는 가르침은, 80년이 넘는 시간이 간극이 무색하게도 강렬하다.
이 짧은 블로그 글을 마무리하는 중, 문득 김향안이라는 인물의 캐릭터에 감탄하게 되면서, 동시에 옅은 연민의 감정이 스쳐지나갔다. 이유를 곰곰히 되짚어보니, 이 모종의 안타까움은 아마도 그녀가 삶에서 깊게 인연을 맺었던 두 연인을 모두 먼저, 그것도 갑작스럽게 떠나보냈다는 점에서 온 것 같다. 느슨한 관계로 이어져있던 사람이 세상을 떠나가도 그 상흔이 꽤나 오래 남는데, 하물며 다른 관계와 비견할 수 없는 정도로 깊은 정서적 교류를 한 특별한 사람을 두 번이나 떠내보낸다는 것. 감히 짐작조차 가지 않는 상실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로 살아가는 그 이후의 30년 동안, 여전히 바지런히 남편의 작품을 알리고, 그가 국내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족적을 남긴 예술가가 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해 지원한 그녀에게 마음 속으로 박수를 보내 본다.
날이 풀리면, 다시 한번 환기미술관에 가고 싶다. 이번에는 김향안의 자취를 따라가며 그녀가 쏟은 에너지와 헌신을 기릴 것이다.